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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펜을 바꾼다고 글씨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낭독 연습(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by 공감사이다 2021. 9. 25.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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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변해야 남이 변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 남이 변하기를 바라는 것은 글씨체가 나쁘다고 펜을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악필 정도는 아니지만 제 글씨체는 그리 좋은 편이 못됩니다. 어떤 이는 제 글씨체를 보고 시인으로서의 개성이 살아 있어서 좋다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부족함이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글씨를 잘 써서 달필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직접 손으로 글씨를 써야 할 때가 많습니다. 시집에 사인해야 할 때도 그렇고, 편지를 써야 할 때고 그렇습니다. 자주 쓰는 일은 없지만 편지만은 꼭 육필로 씁니다. 노트북으로 쓴 편지를 인쇄해서 보내고 나면 무성의함을 그대로 드러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합니다.

(중략)

이처럼 지금은 육필의 시대가 아닙니다. 획일화된 활자체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각종 광고 등에서 캘리그래피가 확산되는 것을 보면 육필의 중요성이 다시 대두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대입 논술을 치를 때는 육필로 써야 하기 때문에 글씨를 잘 쓰기 위해 평소 만년필을 사용하는 학생들도 느는 추세입니다. 논술뿐 아니라 각종 일반 시험에서도 선다형보다 서술형 시험이 강조된으로써 육필의 중요성이 더 커졌습니다. 요즘은 입사시험을 치를 때 면접관이 그 자리에서 육필로 에세이를 쓰게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글씨가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볼 수 있는 기초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글씨는 일단 사람의 인격적 내면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교양과 지적 수준까지 가늠할 수 있는 잣대도 됩니다. 글씨에는 글씨를 쓴 사람의 혼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육필은 그 사람의 내면의 얼굴이며 영혼의 문양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글의 내용이 좋아도 글씨가 엉망이면 일단 선입감이 나빠집니다.

언젠가 육필시 10여 편을 출판사에 보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써보았지만 생각보다 글씨가 잘 써지지 않았습니다. 파지만 자꾸 나고 육필에서 느껴지는 인간적인 따뜻함이나 아름다움이 잘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내 영혼의 문양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나 싶어 참담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펜을 바꾸어보았습니다. 혹시 펜을 바꾸면 글씨가 더 좋아질까 싶어 만년필이란 만년필은 다 꺼내 번갈아가며 써 보았습니다. 그런데 펜을 바꾸었다고 해서 글씨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펜이라는 도구를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니라 제 글씨체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문제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변해야 남이 변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 남이 변하기를 바라는 것은 글씨체가 나쁘다고 펜을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정호승,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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