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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매필10기] 19일차. 밀란 쿤데라는 “사람은 너무 기쁘면 한 가지만 원한다. 온 세상에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때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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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사이다 2021. 6. 19.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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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이 있긴 하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그 일, 그러니까 내게도 씨앗 같은 어떤 일이 생긴 그 일은 내가 처음 열대 지방으로 여행을 갔을 때 벌어졌다.

오래전 어느 해, 나는 연한 장밋빛 일몰이 하늘을 적실 때 열대의 섬에 도착했다. 그날 처음 본 열대 바다는 책을 읽고 상상했던 것과 똑같았다. 파도는 해안선을 애무하느라 바빴다. 파도는 그 애무에 스스로 취했던지 가끔씩 신음 소리를 토해냈다. 나는 가방을 던져놓고 산책을 나섰다. 어 느새 사방이 어둑어둑해져가고 있었다. 그래도 뭔가 환했다. 바닷바람도 더할 나위 없이 우호적이었다. 나는 바닷가 한쪽에 있던 커다란 정원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어쩌면 더 큰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나무들 사이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내 코에 뭔가가 밀려왔다. 어찌나 강렬했던지 입에서 “아!”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조금 휘청거렸다. 바람에 밀려온 그 뭔가는 꽃향기였다. 열대의 꽃향기가 얼마나 무겁던지. 나는 그 날 처음 향기의 무게를 느꼈다. 향기는 안개처럼 자욱했다. 나는 갑자기 열대를 온 감각으로 느꼈다. 점차 내가 향기 속에, 공기 속에 섞이고 녹아드는 것 같았다. 나란 존재는 형체도 없이 해체되고 몇 개의 공기 분자가 되어 주변 모든 것들과 뒤엉키는 것 같았다. 몇 초의 경험인지 몇 분의 경험인지 모르겠다.

나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주변 사물에 완전히 나를 내맡기고 그냥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 순간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었다. 그냥 꽃향기에 굴복한 한 마리 동물이었다. 꽃의 떨림, 향기의 진동이 심장을 뛰게 했다. 그렇게 멍하니 정신을 잃고 서 있던 순간이 그 어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고 강렬했다.

행복했다. 그런 행복이 다른 어떤 행복보다 더 행복같이 느껴졌다. 밀란 쿤데라는 “사람은 너무 기쁘면 한 가지만 원한다. 온 세상에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때가 그랬다. 온 세상의 손을 잡아끌어다 그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나는 누구를 향해서인지 모르는 모호하지만 강렬한 사랑을 느꼈다. 그 경험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에만 담아뒀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세상을 향한 나의 첫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움에 압도된다는 것은 그토록 힘이 세다. 나는 이 후로 몇 번 더 열대의 바닷가로 여행을 갔다. 내게 열대 바다 여행의 의미는 점점 더 확장되었다. 향기에서 출발해 생명으로 이어졌다. 매번 나는 바다의 많은 것들과 부드럽게 섞였다. 열대의 바닷가에서 책을 읽을 때, 바닷바람을 쐬며 걸을 때, 해가 뜨고 지거나 바다에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볼 때, 스콜이 쏟아지면 읽던 책을 들고 맨발로 뛰어 숙소로 돌아갈 때, 소금기 묻은 머리를 감을 때, 그럴 때 삶은 참을 수 없이 환했다. 내가 있던 곳들에서는 생명력이 넘쳤고 나는 그것을 들이마시기만 하면 되었다. 세상엔 아직 아름다움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남아 있었다. 세상은 우리가 알아야 할 세부사항으로 가득했다.

가끔 나는 도시에서도 마치 열대의 향을 찾으려는 듯 코를 벌름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훗날 마르셀 프루스트가 나와 같은 경험을 한 단어로 표현했음을 알게 되었다. '용해' 라는 단어였다. 프루스트는 용해를 대략 이렇게 설명했다. “마치 사랑처럼 내 안에 번져가는 그 행복감과 더불어 내가 어떤 귀한 생명의 정수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제 그저 우연히 태어나서 살아가는 무의미한 존재, 결국 나중에는 덧없이 죽어가고 말 존재로 더는 생각할 수가 없 었다.” 어쨌든 나는 그 단어를 알기 전부터 그 단어를 살아 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혜윤, <앞으로 올 사랑>2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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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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