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고통이 생물학적으로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고통을 이용해 변화를 만든다. 인간은 늘 어느 정도의 불만과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진화해왔는데, 그 까닭은 다소 불만과 불안을 느끼는 생명체가 혁신과 생존에 가장 열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진 것만으로는 절대 만족하지 못하고, 오로지 가지지 못한 것으로만 만족하게 되어 있다. 이런 끊임없는 불만족이 인간이라는 종을 싸우고 분투하며, 번성하고 승리하게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느끼는 아픔과 괴로움은 인간 진화의 ‘오류’가 아니라 ‘특징’이다.
아픔은 어떤 형태든 우리 몸이 스스로를 자극하고 행동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당신이 발가락을 찧었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 그 순간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눈물을 글썽일 만큼 크게 울부짖을 것이다. 어쩌면 불쌍한 무생물을 탓할지도 모르겠다. “빌어먹을 탁자 같으니라고!” 어쩌면 가구 배치에 불만을 제기하기에 이를 수도 있다. “어떤 돌대가리가 탁자를 거기 둔 거야? 장난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발가락을 찧어서 생긴 끔찍한 아픔, 우리 모두가 너무나 싫어하는 그런 고통이 존재하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육체적 고통은 우리 신경 체계의 산물로, 우리는 이 피드백 메커니즘을 통해 저마다 육체의 한계를 재단한다. 이를테면 어디는 가도 되고 어디는 안 되는지, 무엇은 만져도 되고 무엇은 안 되는지를 규정한다. 우리가 한계치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우리의 신경 체계는 기다렸다는 듯이 벌을 내려서 우리가 정신 차리고 다시는 그 행동을 하지 않게 한다.
우리가 질색하는 만큼이나 고통은 쓸모 있다. 고통은 우리가 어리고 부주의한 시기에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우리에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구분해주며,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준다. 게다가 뜨거운 난로 근처를 얼쩡대거나 쇠막대기를 전기 콘센트에 꽂지 않게도 해준다. 따라서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좇는 게 언제나 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고통이 생사를 판가름할 만큼 우리의 안녕에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경끄기의 기술>,마크 맨슨
★필사
★내 생각
이 책은 읽어보지 못해서 내가 이해를 하고 필사를 한 건지 모르겠다. 기회되면 꼭 읽어보고 싶다.
고통이 생물학적으로 꼭 필요하다는 얘기는 들어본적이 있다.
하지만 신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점차 알게되니, (천주교 신자이지만) 하느님의 존재가 없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ㅜㅜ
우리가 질색하는 만큼이나 고통은 쓸모 있다.
이 문장을 보고 정말 질색할정도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이 쓸모있다니, 받아들여야 한다니...
고통은 우리가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구분해주고,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해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느정도는 이해가 된다. 조금씩 더 알게될거라 믿는다. 그래도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이 줄어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할아버지도 너무 큰 고통없이 하늘나라에 가시면 좋겠다. 자주 화살기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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