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소설은 결론이 아닌 과정이며 보상이 아닌 성찰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자신의 몸 밖으로 나아감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색칠하며 경험하는 인간이 된다. 그것을 차라리 평행 세계라고 해도 좋다. 몇 개의 중첩된 세계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중첩된 자리에 그늘진 삶의 이면을 보게 되므로 고난이 왔을 때도 평행 세계의 조각을 꺼내 초콜릿처럼 씹어 먹을 수 있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허구가 아니며, 언제든 예비된 진실이다.
삶이 인간을 받쳐 주기를 멈추어 그가 바닥없는 심연으로 떨어져 갈 때 문학은 그가 아예 지구 속을 통과해 새로운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것은 외면이나 냉소가 아닌 간절한 제의에 가깝다. 문학은 그가 너무 빠른 속도로 떨어지지 않도록 날개를 달아 준다. 그리고 삶의 중력이 한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하여 떨어지는 이는 떨어지는 순간 그것이 떨어짐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의 추진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렇게 바닥을 뚫고 새로운 땅에 도달하려는 이는 오히려 솟아오르고 있다. 문학이 달아 준 날개는 이제 떨어지는 속도를 줄이는 데에 쓰이는 대신 두 발을 다시 땅에 붙이는 데에 쓰인다.
상상력은 지금과는 다른 세계, 다른 삶, 다른 선택지를 그려 보기 위한 조건이다. 허구가 또 하나의 진실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능력은 다른 세계, 다른 삶, 다른 선택지를 내 삶 안에서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다. 무수한 개인의 진실은 문학 속에서 구체화된다. 그것은 사실도 허구도 아닌 진실의 영역이다. 소설의 결말을 향해 급하게 달려간 후에 그래서 이게 나에게 무슨 이득을 주느냐고 묻는 것은 죽음을 향해 급하게 달려간 뒤 그래서 삶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
김겨울, <책의 말들>
★내 생각
★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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