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필사하기
[아바매필9기] 3일차. 상대가 말을 못 알아들으면 그 책임이 발화자에게 있다. <말하기를 말하기>
공감사이다
2021. 5. 2. 23:41
★본문
언젠가 ‘영어권에서는 상대가 말을 못 알아들으면 그 책임이 발화자에게 있기 때문에 상대가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정확히 설명해줄 의무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무릎을 쳤다. 발화자의 책임과 의무! 그 말로 인해 마치 머릿속에 오랫동안 끼어 있던 먹구름이 싹 걷히는 것처럼 내가 그때까지 무척 비합리적이라고 느꼈던 점이 무엇인지 명료히 깨달았다.
한국말은 말하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지 않고 듣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상대가 말하지 않는 것까지 들어야 한다. 게다가 이 책임은 주로 관계에서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만 지워진다. 그러니 내가 관계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면 나는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눈치껏’ 나의 비위를 맞추게 된다(물론 상대가 어려워서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 또는 나를 위해 상대가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높은 차원의 능력이다. 그것은 때때로 대화와 관계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루어지는 대화나 관계는 인간계에서는 불가능하다).
한국인이 눈치라는 기술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하더라도 눈치에는 명백히 한계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걸 꼭 말로 해야 돼?”라는 말이 이렇게나 넘쳐나겠는가? 내가 뭘 원하는지 콕 집어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채주길 바라는 마음도 어느 정도 선이 있지, 갈등으로 번질 때까지 말하지 않으면 서로간에 불필요한 감정만 소모될 뿐이다.
제발 말을 하자. ‘그런 것까지 굳이’ 말로 해야 한다. 인류의 대뇌피질과 브로카 영역이 아깝지도 않은가! 말이라는 효율적으로 발달한 도구가 있는데 왜 말을 안 해놓고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가. 마치 정교한 손가락을 두고 지느러미나 발굽을 쓰려는 것과도 같다. 상대가 내 마음을 모른다면, 말하지 않은 나의 책임이다. 광고 삽입곡으로 널리 알려진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노래는 정겹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한국 사회에 끼치는 해악도 만만찮다.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모른다고 가정해야 제대로 된 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상대를 자꾸만 미루어 짐작하며 발언의 숨은 의도를 캐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정말 피곤하다. 상대는 당신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납작한 세계가 아니다. 상대의 의중을 알아내려 끙끙대는 사람보다는, 하는 말을 담백하게 듣되 의아한 게 생기면 확인을 하는 사람이 나는 더 좋다. 우리, 양지에서 대화를 하자.
원하는 바를 정확히 말하는 연습만 하더라도 커뮤니케이션의 질은 훨씬 나아진다. 더욱 중요하게는 마음에 응어리가 덜 지고, 상대나 주위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게 된다. 나의 경우 상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쌓여갈 때, 그게 많이 쌓여서 덩치가 커지기 전에 상대에게 직접 말하는 연습을 했다. 대신 감정을 싣지 않고 예의를 갖춰서 말하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말해서 관계가 나빠진 경우는 없었고, 오히려 관계가 더 단단해졌다. 내가 그렇게 말함으로써 상대도 나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을 때 부담없이 말할 수 있게 되어, 나 또한 대인관계에서 좋은 피드백을 얻게 되었다.
관계를 정말로 존중한다면 그에 들여야 하는 노력은 예의를 갖춰 정확히 말하려는 노력이지, 참고 또 참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게 전자는 느슨해진 나사를 조이고 기름을 쳐서 관계가 오래가게끔 정비하는 것이고, 후자는 쉽게 나을 수도 있었던 상처들을 덮고 덮어 곪게 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나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은 착각일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대부분 상대도 나를 참아내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예의를 갖춰서 정확히 말을 꺼내보라. 그럼 당신도 알게 될 것이다.
김하나, <말하기를 말하기>
★내 생각
'영어권에서는 상대가 말을 못 알아들으면 그 책임이 발화자에게 있기 때문에 상대가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정확히 설명해줄 의무가 있다.'
(발화자의 책임과 의무)
이렇게 좋은 말을 이제야 알게되다니, 아쉬우면서도 이제라도 알게되어 다행이다!
서양인의 문화이고, 우리나라는 눈치의 문화, 정의 문화가 있듯 '틀린게' 아니라 '다른것'이지만, 서양인의 "발화자에게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는 문화"는 너무나 부럽다.
<비폭력대화>의 저자 마셜 로젠버그는 사람들과 비폭력대화를 나눌때, 자신의 말을 이해했는지 대화에 도움받기위해, 그리고 비폭력대화로 공감으로 연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가 한 말을 들은대로 다시한번 제게 말씀해주세요."
라고 부탁한다.
이렇게하면 서로 얼마나 이해했는지 알 수 있고, 오해한 부분은 수정해서 다시 말해줄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눈치껏'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나는 우리가 눈치보다, "자신의 감정과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로 소통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적당한 눈치는 있는게 좋겠지만 말이다.)
나부터 공감대화를 하면된다.
공감대화로 듣고, 공감대화로 말하기. 내 말을 내 의도대로 이해했는지 상대방에게 물어보고 기다려주어야겠다.
육아가 가장 어렵다. 그 어려운 걸 하고 있다고 나를 쓰담쓰담해주며 차근히 가자.
★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