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성장일기(주제 없이 자유롭게 쓰기)
[아바매필] 필사하는 기쁨.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공감사이다
2021. 2. 18. 02:41
더 이상 잃을 것 없이
형수님께
미루나무 가지 끝의 까치집에도 봄이 소복 담겼습니다.
우용이, 주용이도 봄나무에 키재며 쑥쑥 자라겠네요.
요즈음은 춥도 덥도 않아 징역살기에도 가장 좋을 때입니다.
더 이상 잃을 것 없이 헌옷 입고 봄볕에 앉아 있는 즐거움이 은자의 아류쯤 됩니다.
가내 평안하시길 빕니다.
1980.4.7.
속눈썹에 무지개 만들며
형수님께
지난 생일에는 어머님, 아버님, 형님을 모시고 형수님께서 장만해 보내주신 점심을 먹으며 그동안 밀린 소식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제법 긴 시간이었습니다만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내다가 만 듯 무척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요즈음은 연일 화창한 날씨입니다. 동향()인 우리 방에는 아침에 방석만한 햇빛 두 개가 들어옵니다. 저는 가끔 햇볕 속에 눈감고 속눈썹에 무수한 무지개를 만들어봄으로써 화창한 5월의 한 조각을 가집니다.
우용이, 주용이에게도 삼촌의 안부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1980.5.19.
한 송이 팬지꽃
계수님께
물컵보다 조금 작은 비닐화분에 떠온 팬지꽃 한 포기를 얻어 작업장 창턱에 올려놓았습니다.
행복동의 영희가 최후의 시장에서 사온 줄 끊어진 기타를 치면서 머리에 꽂았던 팬지꽃. 화단의 맨 앞줄에나 앉는 키 작고 별로 화려하지도 않은 꽃이지만, 열두 시의 나비 날개가 조용히 열려 수평이 되듯이, 팬지꽃이 그 작은 꽃봉지를 열어 벌써 여남은 개째의 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한 줌도 채 못되는 흙 속의 어디에 그처럼 빛나는 꽃의 양식이 들어 있는지...
흙 한 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내가 과연 꽃 한 송이라도 피울 수 있는지, 5월의 창가에서 나는 팬지꽃이 부끄럽습니다.
1980.5.19.